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Roma, 2018)는 1970년대 멕시코시티의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가정부 ‘클레오’의 삶을 통해 사회적 계급, 젠더, 돌봄노동, 그리고 기억이라는 개인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흑백의 미학과 절제된 연출로 평단의 극찬을 받은 이 영화는, 단순한 회고담을 넘어 여성성과 사회적 맥락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계급’, ‘돌봄노동’, ‘기억’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로마가 어떤 의미를 지닌 작품인지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계급: 조용한 경계선 위에서 살아가는 여성
클레오는 멕시코시티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합니다. 가족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가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외부인’입니다. 영화는 이 미묘한 위치를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클레오는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빨래를 널고, 잠든 가족을 깨우지만 식사 자리에 함께 앉지는 않습니다. 집안의 주요 사건은 그녀를 지나쳐 일어나고, 클레오는 그저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이처럼 로마는 라틴 아메리카의 가부장적이고 계급 중심적인 구조 속에서 여성 노동자가 어떻게 invisibilized(보이지 않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클레오는 사랑받고 있지만,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시각적 구도—예를 들어 프레임 가장자리에 놓이는 클레오의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가족처럼 지냈다’고 생각했던 여성의 삶을 뒤늦게 다시 바라봅니다. 로마는 바로 그 시선의 변화, 그리고 과거에 묻혔던 계급의 진실을 다시 조명하는 시도입니다.
돌봄노동: 감정노동과 존재의 무게
클레오는 단지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아이들의 울음을 달래고, 이들의 심리적 안정까지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이 영화가 빛나는 지점은 바로 그 ‘돌봄노동’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는 데 있습니다. 돌봄노동은 사회적으로 과소평가되기 쉽습니다. 특히 여성,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 계층의 여성이 수행할 때 그 노동은 ‘자연스러운 역할’로 여겨지고, 보상이나 인정 없이 소비됩니다. 로마는 이 과정을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강하게 묘사합니다. 영화 속에서 클레오가 유산을 겪고도 아무 말 없이 일을 계속하는 장면, 해변에서 아이들을 구한 뒤 멀리 서서 울음을 삼키는 장면은 그녀의 내면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에게 깊은 감정을 전달합니다. 감정노동은 말보다 무겁고, 침묵은 가장 큰 외침이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클레오를 ‘희생적인 여성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침묵과 묵묵함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구조적 불평등과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무게를 직면하게 만듭니다.
기억: 개인의 이야기로 본 사회의 단면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가정부 ‘리보’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단순한 픽션이 아닌, ‘기억의 복원’이라는 성격을 띕니다. 쿠아론은 클레오의 이야기를 통해 어린 시절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복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억은 항상 누락된 진실을 포함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영화는 클레오의 시선과 주변 인물들 간의 거리감을 일관되게 유지합니다. 이는 관객이 ‘중심인물’을 따라가기보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 현실에 주목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클레오의 고요한 일상 속에서 197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 도시화, 폭력적 진압 등이 배경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쿠아론은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클레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기억이라는 것은 항상 개인과 사회의 접점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로마를 다시 본다면, 그 기억은 단지 과거 회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는 구조와 감정의 복제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보이지 않았던 삶을 비추는 카메라 "로마"
로마는 화려한 이야기나 빠른 전개 대신, 조용한 카메라와 절제된 감정으로 한 여성의 삶을 기록합니다. 그 여성은 수많은 이름 없는 여성들과 겹치며,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외면해온 삶의 결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도 마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연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 역전 서사의 원조, "슬럼독 밀리어네어" (빈곤, 운명, 사랑) (0) | 2025.03.30 |
---|---|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해석 (폭력, 침묵, 구조) (0) | 2025.03.30 |
언론의 책임을 묻는 시선 "스포트라이트" (진실, 권력, 시스템) (0) | 2025.03.29 |
2025년에 다시 보는 "택시운전사" (진실, 공감, 현대사) (0) | 2025.03.29 |
전쟁의 공포를 체감하게 하는 "덩케르크" (생존, 시간, 사운드) (0) | 2025.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