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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위선과 권력의 민낯, "엘르" (불편함, 위페르, 권력&성)

by fruta 2025.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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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영화 포스터
("엘르" 영화 포스터)

 

《엘르(Elle, 2016)》는 성폭력을 다루는 영화 중에서도 가장 도발적이고 불편한 작품으로 꼽힌다. 일반적인 피해자 중심 서사와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이 영화는, 주체적인 여성 인물과 성폭력 이후의 감정과 태도를 새롭게 접근한다. 폴 버호벤 감독은 전작들에서 보여준 충격적 이미지와 통찰을 그대로 이 작품에도 녹여냈으며, 이자벨 위페르는 그 어떤 배역보다 복잡하고 다면적인 ‘미셸’이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엘르》는 단순한 범죄 영화도, 여성 영화도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욕망, 사회적 위선, 권력 구조 속 젠더 역할을 거칠고도 날카롭게 파헤치는 심리극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계속해서 불편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영화가 끝나고 나면 질문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이 영화는, 21세기 가장 논쟁적인 작품 중 하나다.

도발적인 설정, 불편함을 선택한 영화

《엘르》의 오프닝은 충격 그 자체다. 미셸은 자신의 집에서 강간을 당한다. 그러나 그 뒤 이어지는 그녀의 반응은 관객의 예상을 완전히 배반한다. 공포에 떨고 무너지기는커녕, 미셸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지속한다.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고, 동요하는 기색도 거의 없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을 시험한다. 피해자는 반드시 약하고 눈물 흘려야 하는가?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의 정형화된 이미지가 과연 정당한가? 폴 버호벤 감독은 이 영화에서 ‘피해자의 서사’를 철저히 해체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권력과 게임’을 배치한다. 미셸은 성공한 게임회사 CEO로, 아버지가 연쇄살인범이었다는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는 직장에서 남성 부하직원들을 단호하게 통제하고,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권력을 쥐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여성’이지만, 이 인물은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냉정하고 독선적이며, 권력에 중독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인물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 관객은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런 ‘공감 불능의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조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혁신적이 된다. 미셸은 복수를 결심하기보다, 가해자와의 관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그녀는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주도권을 쥐려는 ‘플레이어’가 된다. 이러한 설정은 수많은 윤리적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수용하거나, 심지어 어떤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타락한 것인가, 아니면 복잡한 인간 심리의 또 다른 모습인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정답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철저히 ‘미셸’이라는 인물의 주체성과 선택을 중심에 두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권력의 흐름을 따라간다.

이자벨 위페르, 여성 주체의 경계에 선 얼굴

《엘르》가 완성도 높은 심리극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데에는, 주연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영화 내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한 컷 한 컷마다 억눌린 분노와 혼란, 냉소와 의지 등을 절묘하게 배합해 보여준다. 마치 갑옷을 입은 채 삶을 통제하려 애쓰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대변하듯, 그녀의 표정과 움직임은 단 한순간도 평면적이지 않다. 위페르가 연기한 미셸은 관객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냉정하고, 때로는 잔인하며, 감정적으로 닫혀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억압 속에서 형성된 방어 기제가 숨어 있다. 특히 어린 시절 아버지의 범죄 이후 사회적으로 ‘낙인’ 찍히고, 그 이후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차가운 전략가’가 되어야 했던 그녀의 삶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을 품고 있다. 위페르는 이러한 캐릭터를 단지 ‘센 여자’로 연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극도로 복잡한 내면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상처받으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조용히 그려낸다. 그녀는 카리스마와 취약함을 동시에 드러내며, 미셸이라는 인물의 다면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감독이 이자벨 위페르를 캐스팅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녀의 연기 없이는 이 영화의 모든 윤리적 모호성과 감정의 복잡함이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관객에게 “이 인물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 건, 그녀의 연기가 가진 설득력 덕분이다. 연민도 비난도 쉽지 않은 이 인물은, 보는 내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결국 깊은 인상을 남긴다.

권력, 성, 그리고 사회의 가면을 벗긴다

《엘르》는 단순히 개인의 심리극을 넘어서,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위선’과 ‘권력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권력 관계’ 속에 있다. 미셸은 직장에서 성희롱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권위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다른 여성 동료를 누르기도 한다. 그녀의 연인은 그녀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들은 무책임하며, 친구들은 겉으로는 다정하지만 모두가 감정을 숨기고 살아간다. 이 모든 관계에서 영화는 ‘진짜 감정’과 ‘사회적 가면’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특히 성과 권력은 이 작품의 핵심 주제다. 강간이라는 범죄가 발생한 후, 그것이 단순한 피해와 가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이의 권력 구조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고발하는 방식은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강렬한 메시지다. 버호벤 감독은 성적인 요소를 자극적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이며, 사회적 틀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되고 감춰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강간 장면은 폭력적이지만 동시에 ‘이후’가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범죄의 순간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구조, 그리고 권력의 흐름이 진짜 이야기다. 《엘르》는 그 누구에게도 명확한 정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보는 사람에게 무수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왜 피해자에게 일정한 감정 반응을 기대하는가? 권력은 어떻게 위선 속에 숨는가? 여성의 욕망은 언제부터 사회적으로 검열되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에 녹아 있다.

 

 

《 엘르》는 보기 쉽지 않은 영화다. 불쾌하고, 모호하며, 감정적으로도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목적 없는 자극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버린 ‘정상적인 반응’과 ‘도덕적 서사’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미셸이라는 인물은 피해자도, 영웅도 아니다. 그녀는 한 인간이며, 동시에 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과 감정을 통제하려는 존재다. 《엘르》는 사회적 틀에 갇힌 감정의 프레임을 깨뜨리고, 관객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묵직한 물음을 남기며,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진짜 ‘감정과 권력의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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