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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황금곰의 기준을 바꾼 작품 (감정에 서툰 사람들, 몽환적 러브스토리, 황금곰상 수상작)

by fruta 2025.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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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꿈을꾼다" 영화 포스터
("우리는 같은 꿈을꾼다" 영화 포스터)

 

2017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On Body and Soul)는 사랑에 서툰 두 사람이 공유하는 꿈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통해, 감정의 교감과 내면의 변화, 그리고 인간적인 연결을 조용히 탐구하는 작품이다. 헝가리의 감독 일디코 에네디는 잔혹한 현실과 순수한 꿈을 오가며, 감정이라는 언어 이전의 세계를 은유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로맨스의 틀을 벗어나, 깊은 심리 묘사와 몽환적 이미지, 상징적인 공간을 통해 ‘사랑’이라는 주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고요하고 낯선 분위기 속에서도 마침내 진심이 전해지는 이 영화는, 영화 예술의 가능성과 감정의 본질을 동시에 보여주는 독창적인 성취로 평가받는다.

감정의 언어를 잃은 시대, 침묵으로 연결되는 관계

영화의 배경은 도축장이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과 피비린내가 감도는 공간에서, 주인공 마리아와 엔드레는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관계였다. 그러나 둘은 매일 밤, 같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들은 사슴의 모습으로 등장해 눈 덮인 숲을 함께 걷는다. 꿈은 감정이 언어로 전달되기 이전의 상태, 감각적 교감을 암시하는 은유적 공간이다. 마리아는 감정 표현이 극도로 서툰 인물이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녀는 타인의 말을 메모하며 표정과 행동을 모방한다. 엔드레 역시 내향적이고 상처 입은 존재다. 말보다 침묵, 행동보다 관찰이 익숙한 그들이지만, 꿈을 통해 연결되면서 현실에서도 서서히 가까워진다. 이 영화가 인상적인 이유는, 이처럼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을 통해 오히려 더 강한 감정적 울림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대사보다는 표정과 침묵, 주변 환경에 집중한다. 이로써 관객은 영화 속 감정을 직접 ‘해석’하고 ‘느끼게’ 된다. 현실의 날카로운 질감과 꿈의 부드러운 색감은 강한 대비를 이룬다. 감독은 이를 통해 현실에서는 표현하지 못하는 진심이, 꿈을 통해 전달될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이 독특한 연출은 감정의 언어를 잃어버린 현대 사회에 대한 깊은 은유이기도 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상징으로 풀어낸 감정의 진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사랑을 단순히 연애 감정이 아닌, 존재의 변화와 수용의 과정으로 그려낸다. 마리아는 처음에는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엔드레와의 교감을 계기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이 과정은 단순한 성장 서사를 넘어, ‘감정’이란 것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천천히 자라나는지를 보여준다. 사슴의 이미지는 중요한 상징이다. 순수하고 민감한 존재인 사슴은, 말없이도 함께 걷고 머무는 존재다. 꿈속의 사슴들은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마리아와 엔드레가 겉보기에는 무표정하고 무뚝뚝하지만, 내면에서는 서로를 향한 깊은 울림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도축장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소다. 사랑 이야기를 이처럼 무감각한 공간에서 시작한 것은, 사랑 또한 생존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감독의 시선이 느껴진다. 감정이란 것은 외부 자극에 의해 깨어나며, 때로는 상처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 상처를 껴안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진짜 ‘연결’이 이루어진다. 마리아가 감정을 익히는 방식도 흥미롭다. 그녀는 심리상담을 받고, 자신의 감정을 테스트하며, 심지어 스스로를 연습한다. 이는 사랑이 본능이 아니라 ‘학습’될 수 있는 감정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을 해체하고, 감정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황금곰의 선택, 영화 언어의 미학과 확장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언제나 사회적 메시지나 형식 실험을 중시해왔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가 황금곰상을 수상한 이유도 단순한 서사가 아닌, ‘감정’이라는 비가시적인 소재를 어떻게 시각적 언어로 풀어냈는지에 있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정적인 톤을 유지한다. 빠른 편집이나 자극적인 장면은 없다. 오히려 침묵, 반복, 간격 같은 ‘빈 공간’을 활용해 감정의 결을 표현한다. 이 같은 미니멀리즘은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감정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라는 감독의 철학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도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알렉산드라 보르벨은 거의 눈빛과 호흡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게자 모르차니 역시 말보다 표정으로 감정의 흐름을 이끈다. 이는 연기라기보다는 ‘존재 자체’로서 감정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베를린에서 이 영화가 수상했다는 것은, 영화 예술이 여전히 감정과 철학을 담아낼 수 있는 매체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거대한 드라마도, 화려한 기술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한 작품이었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감정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조용히 질문하는 영화다. 도축장과 사슴, 침묵과 꿈, 무표정한 얼굴과 섬세한 눈빛 등 상반되는 요소들을 통해, 이 영화는 ‘연결’이라는 본질을 탐색한다. 감정에 서툰 이들이 만들어낸 이 기묘한 러브스토리는, 말보다 꿈이, 설명보다 공감이 더 큰 진심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황금곰상 수상은 단지 수상의 의미를 넘어서, ‘이런 영화도 존재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감정을 잃은 시대에 이 영화는 말한다. “우리는 같은 꿈을 꿀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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